《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와 28명의 군주를 가진 나라였다. 평균 재위 기간은 25년으로 한국사 역대 왕조 중 가장 긴 편이었다. 참고로 이로부터 700여 년 뒤의 왕조인 조선 군주의 평균 재위 기간이 19년 2개월인 걸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재위 기간이다.
다만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3대의 계보가 상당히 비현실적인 것을 보았을 때 이 사이에 누락된 군주가 더 있었거나 신라나 백제의 초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건국 및 초기 연대에 약간의 왜곡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그렇다면 평균 재위 기간은 조금 깎일 여지가 있다.[1] 아무튼 후대의 고려와 조선보다 훨씬 오래 존속했으면서도 군주의 수가 고려보다 적고 조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군주들의 평균 수명이 비교적 길었거나 왕권의 안정성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다수의 고구려 군주들의 시호가 완전하게 전하지 않으며, 광개토태왕의 경우를 보건대 완전한 시호는 꽤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2] 광개토태왕의 경우에는 그나마 광개토태왕릉비가 남아 있어서 완전한 시호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흔히 국왕이 묻힌 장지(葬地)의 지명으로 그 국왕을 호칭했다. 삼국사기에
秋九月, 大后于氏薨. 大后臨終遺言曰, “妾失行, 將何面日, 見國壤於地下. 若羣臣不忍擠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 如其言. 巫者曰, “國壤降於予日,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가을 9월에 태후 우씨(大后于氏)가 죽었다. 태후가 임종함에 유언하기를,
“내가 도의에 어그러진 행동을 하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을 뵙겠는가? 만일 여러 신하들이 차마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못하겠다 여긴다면 나를 산상왕릉 옆에 장사지내 주기 바란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말대로 장사지냈다. 무당(巫者)이 말하기를,
“국양께서 저에게 내리시어 말씀하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山上)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와 싸웠다. 돌아와 생각해 보니 낯부끄러워 차마 국인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무엇으로 좀 나를 가리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삼국사기 권제17 고구려본기제5 동천왕 8년(234년)
라고 해서 고국천왕을 '국양', 산상왕을 '산상'이라고 그 묻힌 곳을 들어 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광개토태왕이 묻힌 '국강상'은 당시 수도이던 국내성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서에 나타나는 고국원왕의 '고국원', 고국양왕의 '고국양'과 같은 곳으로 보인다. 고국원왕의 또 다른 호칭이 바로 '국강상왕'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하던 당시에는 국내성 인근을 가리켜 '국강(國崗)'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평양으로 도읍이 이전한 뒤에는 옛 수도라는 의미에서 '고국원(故國原)'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3] 군주가 묻힌 곳으로 군주를 호칭하는 방식은 훗날 고려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표적으로 세종을 그 능인 영릉(英陵)이라고 부른 것이 있다.[4][5]
삼국시대가 정복 국가 시대이고 특히 고구려가 그러한 성향이 두드러진 만큼 정복 군주가 상당히 많았는데, 고구려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동명성왕, 대무신왕, 태조대왕, 미천왕, 광개토태왕, 장수왕 등이 있다. 이 중 한국 역사에서 꼽히는 대표적인 정복 군주가 바로 광개토태왕.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으로 보고 있고, 한국 학계의 대다수는 이 설을 따르고 있다. 북한과 한국 소수 학설에서는 일부 고구려 일부 역사가 삭제되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 건국 연도를 기원전 300년 근처로 보고 있다. 당나라의 한 장수가 언급한 고구려 900년설을 따른 것. 실제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년인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옛 조선의 땅에 고구려라는 집단이 존재했다는 중국측 사료는 많이 있다. 그래서 기존에 토착 세력인 고구려 집단 혹은 초기왕국을 부여에서 이주한 추모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왕위를 쟁취한 시점이 기원전 37년이며 이때를 고구려 건국년으로 보는 것이다. 다만 일본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설을 따르기도 하고, 위키백과 등에서 그렇게 서술되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뢰성 문제로 실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태조대왕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백제 건국을 생각하면 지나친 고구려 역사 축소다.[6]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이 그랬듯이, 왕위를 계승하는 형태에서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대무신왕 때부터 산상왕 때까지는 형제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지만, 산상왕 때부터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됨에 따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개 고구려의 왕위는 부자간에 계승되기 시작했다.[7]
여담으로 현재 고구려 왕실의 후예를 자처하는 것이 바로 횡성 고씨로 전국에 약 6,000여 명 정도 살고 있다. 추모성왕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중시조는 고구려의 마지막 군주인 보장왕의 아들 고인승인데 바로 고구려부흥운동 때 잠깐 군주로 추대됐던 고안승의 형이라고 족보 전승에 언급된다. 고인승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기타 왕족들처럼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고 강원도 횡성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족보로만 따진다면 초대 군주 고주몽의 21대손이자 고구려 군주들 중 가장 유명한 광개토대왕의 9대손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따르면, 고인승은 추모의 26대손이 된다.